[회원기고] 연재_2. 생활인문학: 공감과 실천, 회의와 비판, 배려와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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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03-05 조회수 9


2.생활 인문학: 공감과 실천, 회의(懷疑)와 비판, 배려와 조화



글: 강태원 회원(유튜브 크리에이터: 사색실천)



 

▲"인문人文"이란, 인간(현상)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가치와 문화를 말한다. [약칭 인문정신문화진흥법 제3조].



인문의 세계는 방대하며 심오하다. 인문을 정의하는 데에만도 책 한 권 분량이 필요하다. 그러하니, 우선, 인문학과 인문정신에 대한 첫걸음을 가볍게 내치고자, 우리 주변에서 유행하는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사이비 인문학(似而非 人文學) 관념들을 부정하면서 역으로 접근해보자. 그렇게 문턱을 낮춰서 흉금을 터놓고 공감함으로써, ‘내 안의 인문학 정신’에 좀 더 근접해보자 한다.



 

▲ 人文學이, 일반적으로 분석-비판-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식적(假飾的)인 ‘말발’이나, 현란한 ‘입문학’[주둥이(口)文學]은 아니다. 


인문학은 자신의 교양/지식을 뽐내기 위한 장식이나,  과시적 입담이 아니며,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지식비교우위학이 아니다.



 

▲ 人文學의 중핵(中核)은, 한때 멋 모르고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만, 더 이상 유한계급(有閑階級)의 지적 탐닉과 권태 극복을 위한 구라(口羅)가 아니며, 한낱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능한 수사학(修辭學:rhetoric)이나, 표현의 기교학(技巧學)도 아니며, 기존의 ‘문사철시서화’로만 대변되던 교양장식학(敎養粧飾學)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다.



 

▲ 人文學적 사유는, 백과전서의 잡학지식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단절적인 요약 상식이 아니다. 또한 온갖 인기 토크콘서트가 다루는 '인문학에 대한 맛보기' 수준의 풍류와 오락도 아니며, 철저한 통찰과 사유가 동반되지 않은, ‘요점 정리식 신변잡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밑줄치고 별표 치고 형광팬으로 강조한, 즉석가공 암기지식이 아니다. 자의적(恣意的)으로 선택해도 좋고, 포기해도 좋은, 인생 변두리의 무용지물이거나,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적 넋두리도 아니다.



 

▲ 인문학적 사유는, 맘 내키면 아무나 도전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인수분해나 방정식이 아니다. 사랑과 운명 같은 인문학적 개념 하나를 깨닫는 데에만도 평생이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흑백논리로 치닫는 ‘답정너’의 독단론도 아니며, 지식 측정용 객관식 선다형 문제풀이도 아니며, 기-승-전-‘돈’으로 귀결되는, 효율성과 생산성 제일주의의 표명(表明)도 아니다.



정보처리능력을 신장시켜 자신의 노동 가치를 높이려는 생산성 지향 활동이나, 가성비를 높이려는 효율적인 정보 추구 활동은, 인문학과 거리가 멀다. 무조건 해답을 찾고 보는, 조급한 속성 결론학(速成 結論學)도, 두루뭉술 ‘대충 까이꺼’하며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인생 만병통치 개똥철학도, 역시 인문학적 사유와는 무관하다.



 

▲ 人文學은, 사회적 강자들이 자신들의 의사(意思)를 약자들에게 억지로 관철하려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작태나, 아전인수식 궤변술(詭辯術sophistication)도 아니며, 사리사욕의 입신양명용 출세학(出世學)이나 인생 성공담도 아니며, 생존을 위한 경쟁 필살기도 아니며, 물질 지향적인 처세술도 아니며, 영리 목적의 장기적인 대인친화능력기술도 아니다.



▲ 人文學 정신은, 통찰 없고, 실천 없고, 양심 없고, 깊이 없는, 능구렁이식 가면인격형성을 위한 수련 지침이 아니며, 낡은 시대사조나, 대세적인 시대정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승도 아니며, 부패권력과 불의에 대한 복종도 아니며, 곡학아세도 아니며, 현학적인 위선도 아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방향을 바꿔서 人文學을 긍정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좀 더 참된 인문학 정신에 근접해보자.



 

▲인문人文의, 인(人生)이, 고뇌가 다듬어가는 심신(心身)의 빛깔이요, 생각과 행동이 빚어내는 개성의 향기요, ‘자기결단’과 ‘자기책임’으로 이뤄지는 개선(改善)의 행진이라면, ‘문(文)’은 모진 숙명과 허무주의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며, 각성의 지혜로 승화하는, 반전(反轉)의 창의력(創意力)이다.



 

▲ 인문학(humanities)은, 인간과 사상과 문화를 다양하게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소통(疏通)과 개성(個性)의 공감학(共感學)이다. 그 누구도 편벽고루하게 상아탑의 엘리트주의에만 빠지거나 전공과 전문영역에만 파묻혀서는, 그 어떤 보편성을 지닌 유의미한 인문학적 공감을 얻을 수 없으며, 그저 독단적인 ‘전문인의 야만성’에만 갇혀 있게 될 뿐이다.



 

▲ 인문 정신은 평화로운 시기보다는 위기의 시대에 더 명철하고 찬란한 빛을 드러낸다.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폭압 정권과 직면할 경우, 비판과 설득과 공감의 인문정신은, 시민들의 비분강개와 고통을 용감하고 솔직하게 증언하는 정의의 깃발이기도 하며, 봉건적이고 반칙적인 특권 세력과 충돌하면서, 온몸으로 개혁과 공정의 목소리를 내는, 부단한 양심의 외침이기도 하다.



 

▲ 인문정신은 문화적 폐쇄성과 국수주의적 불관용과 불합리한 차별을 이겨내고 더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사리사욕으로 인하여 공론왜곡과 허위보도를 일삼는 기존의 메이저 레거시 언론매체의 부당한 작태를 직시하는 식별력, 더 이상 이런 술책에 기만당하지 않는 현명함, 그렇게 나 너 모두를 위해 제대로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 의식이 곧 인문 정신이다. 우리의 미디어 문해력은 일관되게 공정 보도를 지향하는, 솔직하고 양심적인 언론매체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공감하며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열린 민주시민광장에서, 왜곡되지 아니한 사실에 근거해 개인들이 주고받는 허심탄회한 ‘의사소통’은, 역사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개혁을 올곧게 추동하려는, 생동력 넘치는 집단지성이요 공감과 공론 형성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사회현실 참여적인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지혜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맹자가 주장했던 대인군자의 정의감이요, 인문정신이기도 하다.



 

▲ 인문학의 직접적인 효용은, 바로 지식(학문) 추구 행위 그 자체와 그런 학문 행위 속에서 얻는 즐거움(법열;法悅)에 있다. 인문학이 주는 사회적 유용성(예: 문화자본 확대에 따른 생산성 제고)과, 개인인격향상효과(예: 인격 함양, 지혜 터득, 편견감소, 창의적/비판적 사고 확립 등)의 측면은, 틀림없이 인문학적 훈련의 결과일지언정, 다른 인생 맥락과 학문 영역을 통해서도 획득될 수 있으므로, 이것들은 인문학의 간접적인 효용이라 말할 수 있겠다.



 

▲ 생활 인문학은, 회의(懷疑)하고 성찰(省察)하고, 비판(批判)하며, 발전하는 실천 행동학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바탕에 깔린 인문주의(人文主義:人本主義;人間主義: humanism)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다. 이것은 신본주의(神本主義), 애니미즘, 샤머니즘, 자연주의 등에 대조를 이루며, 인간존재, 인간능력, 인간성품, 인간소망, 인간행복,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다. 환경과 생태가 인간과 인재(人災)로 인하여 극도로 망가졌고 피폐해진 작금에, 이러한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 오히려 지구환경문제들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할 지구 생명 공존공영 지속의 길은 휴머니즘 너머에 있는 생명생태주의이다.




▲ 인문학은, 인간 사회 조직의 만병근원에 대한, 지시적이고 교조적인 처방학이 아니라, 통찰적이고 비판적이며 발전적인 대안을 발굴-제시하려는 선견지명의 진단학(診斷學)이다. 점차 입체적으로 첨예하고 다양하게 상호연결되어가는 디지털 세계와 토론광장에서, 인문 교양을 갖춘 민주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더 나은 생명 환경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사회적 폐단을 개혁해 나아가야 한다.




▲ 인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행동하면서 사색하고, 사색하면서 행동한다. 정의와 평화와 생태를 위해 깨어 있는 민주 시민의 조직적인 힘이 바로 생동하는 양심으로서의 인문 정신이다. 민주시민은 헌법제정권력이요 주권자라는 지위와 자격을 가진 것만으로도, 다양한 국내 사회적 부패양상에 대한 책임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초연한 방관자나 문외한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다. 권력이 응집된 곳에서 민주적인 개혁이 잠시라도 멈추면, 그것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그러한 탐욕적이고도 악마적인 속성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최후 보루는, 건전하게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 의식이다.




▲ 인문학은, 고전과 전통사상에 대한 소극적인 수용이 아니라, 고전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반론과 주체적인 재해석학이다. (그래서 인문학도라면, 옛 성현들의 말씀과 진귀한 경전에 대해서도 기꺼이 비판하고 통찰하며 창의적으로 진일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네~네~네~’라고 착하게 대답하고 맹종하는, 소극적 듣기(聞學)를 넘어선, ‘왜?왜?왜?’라고 적극적으로 회의懷疑하며 반문反問하는 변증법적인 질문학(質問學)이며, 그러한 적극적인 질의응답 과정에서 생각을 심화시켜가는 사색학思索學이요, 주관학主觀學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좌우명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경청하라,공감하라,질문하라,회의(懷疑)하라,탐구하라,비판하라,통찰하라,통합하라,터득하라,그리고 실천하라.



 

▲ 동양의 인문학은, ‘든 사람(지식인)’이나 ‘난 사람(성공인)’보다는, ‘된 사람(인격수행인)’을 지향하는 역지사지의 공감학이다. 그것은 좀 더 훌륭한 인격체가 되고자 초지일관하는 ‘심신수양의 태도’이자, 일신우일신 각고하는 무실역행이다. 인간은 무수한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 지혜를 습득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동물이다. 그러나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고, 사람이 (옳은 것만) 너무 살피고 따지면 친구가 없다(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그러므로 인구에 회자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는 사람’이란, 사람이 아닌 상상의 산물일 뿐이며, 그럴 정도의 결벽과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이, 사회적인 책임과 국가권력을 거머쥐게 되면, 오히려 그 사회는 위험해지기 쉽다. 너무도 올곧음으로만 경직된 채로, 순일무잡(純一無雜)의 비인간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무결점의 도덕정치를 주관하고자 노력했던 인물들(예:로비에스삐에르)이 빚어냈던 전체주의나 공포정치를 떠올려보라. 더 말해서 무엇하랴. (민주시민으로서 어떤 정치지도자를 선택할 경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결점 무오류의 유형을 찾기란 불가능하며 그런 유형의 인물은 실제적인 정치 상황에서 바람직하지도 않으므로, 우리는 입후보자의 경제외교안보국방 등의 총체적인 국정수행능력, 헌법정신 수호 능력, 국리민복을 위한 참된 노력, 지도자다운 언행의 일관성, 국제정세 판단 및 대처 능력, 국가사회에 대한 공헌 이력, 선진적이고 민주적이며 헌신적인 정치 이력과 행보, 공약 이행 능력, 합격수준의 청렴결백도 등에서 판단할 일이다.)



 

▲ 동양의 인문학은, 서양의 인문학과는 달리, 이론과 지식 차원을 넘어서서 실행과 수양으로 나아가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언행일치학이다. 특히 유교에 따르면, 세계의 이치는 천(天)과 순천(順天)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맹자의 사상에 나타난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윤리적으로 자율적이고 실천적인 존재로 남아 있으며, 배타적인 종교에 매몰된 서양인들처럼, 초자연적인 신비성이나 망상이나 불합리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선량한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세계가 부여한 순천의 윤리의 씨앗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선량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인 자유지정(自有之情)이요 사단(四端)이다.



이것은, 곧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이름이다. 사단을 함양하면 당연히 모든 언행에서 옳음을 좇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부패와 악을 척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치 참여로서 발현되는 사단은, 최적의 순천(順天) 수단이 된다.(예; 역성혁명:易姓革命)




▲ 디지털 시대의 인문정신은 무수한 정보에 대한, 명확한 검색-체크-평가-조합-판단의 디지털 문해력이다. 지금은 하루에만도 각자에게 쏟아지는 데이터와 정보가, 개인의 처리용량을 훨씬 초과할 만큼 쓰레기처럼 넘쳐나는, 이른바, 정보홍수시대다. 이런 시대일수록 각자가 살고 있는 다양한 정보 범람 환경 속에서, 엉뚱하고 기만적인 정보로 인해, 더 이상 살아있는 호구(虎口)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되겠다. 불필요하게 피해당하지 않으려면, 각자가 자신의 판단 능력에 따라, 좀 더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참되고 명확한 정보를 찾고, 평가하고, 조합하고 검토하는, 기만(欺滿)방지의 디지털 문해력(anti-deceptive digital literacy)을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곧 디지털 인문정신이다.



 

 

■ 협소한 인문주의를 넘어선, 목포환경단체의 홍익생태(弘益生態)활동!



인문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록 학문적 지식일지라도) 독특한 종류의 즐거움, 즉 공통된 지식(진리) 추구에 기반을 둔 즐거움을 제공해왔다. 그러한 학문적 즐거움(법열法悅과 유사함)은, 자본에 근거한 여가의 사유화(the privatization of leisure)나,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각적 쾌락과는 대조적이다. 오늘날의 인문학적 향유(享有)는 더 이상 사회경제적 계급이나 특별한 지위를 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변화한 상황 덕분에, 이전에는 특권층에게만 당연시되던 영역들에 대해서도, 누구나가 공개적이며 회의(懷疑)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으로 문제해결책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고도의 현대대중소비사회에서 스스럼없는 인학문적 향유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를 긍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으며, 이는 선진적인 민주주의와 친환경적인 생태주의의 초석이 되는 공적 영역을 강화할 수 있다.




이미 인문 정신이 충일한 목포환경단체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각자의 ‘몸’을 튼실히 하여, ‘마음’을 올곧게 닦고, 선진적인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부단히 자아를 성찰하고 인격을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도주의(人道主義) 실현에 기여함은 물론, 나아가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태환경보전으로 나아가는 ‘인문생명환경탐구학(人文生命環境 探究學)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공감과 참여의 노력은, 자연에 감사하는 몸공부와 마음공부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재세이화(在世理化)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거쳐, 생명친화적인 자연환경을 지속시키려는, 전 지구적인 홍익생태(弘益生態)활동으로 완성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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