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연재_3. 인문학과 '악의 진부성(단순성, 피상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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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03-05 조회수 10


3. 인문학과 ‘악의 진부성(陳腐性:常套性;단순성;피상성)’의 문제



 

글: 강태원 회원(유튜브 크리에이터: 사색실천)




▲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인간이면 다 인간이냐?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지!”라고. 그러나 공교롭게도 '인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인성 개념 스펙트럼은, 반사회적인 극악에서 친사회적인 극선에 이르기까지 광대무변이다. 모든 악행과 모든 선행이 인간과 인성이라는 단어개념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지만, 이해관계로 빚어진 비밀스러운 갈등 국면에 직면한 사람이, 양심껏 선행으로 나아가기란 결단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조건으로 무비판으로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악함조차 외관상으로는 평범해 보이고 모범적으로 보이기 일쑤라서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눈뜬 봉사처럼 그 외양에 너무나도 잘 속아 넘어간다. 누구나 평소에는 자신의 과도한 탐욕을 잘 참고 숨기며 지낸다. 그러나 이렇게 착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상황만 맞아떨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탐욕의 노예가 되어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기도 한다. 그런 사악한 성향을 강하게 지닌 사람들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정신적인 인격분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속으로 초자아와 이드의 갈등을 빚으며, 실리 앞에서 자신의 양심과 도리를 팔아먹으려는 기회를 호시탐탐 엿볼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탐욕의 모리배들이 저지르는 소탐대실의 비리들을 연상해보라. 소위 '엘리트'라는 헛똑똑이 탐관오리들이 저지르는 파렴치한 범행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범행들은 인간의 변덕과 무한한 모순 가능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인간의 지성은 양날의 칼이다. 이치상으로는 지성은 마땅히 윤리성과 비례관계를 이뤄야 하겠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그 둘의 관계가 반비례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이제부터는‘Banality of evil’악의 상투성[진부성/평범성/단순성]에 대해 심도 있게 몇 마디 나눠보자. 


이 말은,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의 결말부에서,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이 용어는 애당초부터 한나아렌트가 자신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불분명하게 표현하여, 해석상의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아렌트는,다음과 같이 예시한다. 너무도 헐벗고 굶주려서 돼지 사료조차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당시 포로들(러시아인)을 보고, 러시아인은 모두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일반화하는 독일인 소작농의 단순무식함이나, 타인의 현실적인 고통을 전혀 모르는 아이히만의 멍청함은, 정말로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황당하며 터무니없다. 바로 이런 피상적인 무논리의 작태가, ‘악의 상투성/단순무식성’이다! )



 

전범재판을 통해 악의 정체성을 명확히 논리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철학자 한나아렌트가 끝내는



'악은 너무나도 상투적이고 피상적이고 단순하며 진부해서, 굳이 이렇다 할 악마적 차원의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저 극단적(extreme)일 뿐이다. 그것은 사유무시(thoughtdefying)이자 공감불능이다!(요약)'고 역설하며 재판의 논쟁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전략)-----아이히만에게는 광적인 반유대주의 또는 어떤 종류의 세뇌도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조직 및 단체에 대한 가입자였다. 그는 YMCA, Wandervogel Jungfrontkämpferverband에 속했다. 그의 범죄행동이 치밀한 악의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과, 소속 참여자로서의 필요성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지도자 없는 개인 생활을 어색하고 난해하다고 느꼈다. Eichmann은 거의 평생동안 "상상력 부족""사고 능력 부족"으로 고통받았으며, 잔학한 조치를 취할 권한이나 전문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로 특정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렇게 그의 인격을 무너뜨린 악덕Eichmann은 바로 그의 허세/허풍(bragging자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의 지능과 과거 가치를 과대평가해왔다......(후략)...” 라고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Eichmann in Jerusalem』 에서 술회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숭배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자나, 누군가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독립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인생의 직립보행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은, 명령권자가 시키면 무슨 일이든지 물불 안 가리고 실행하려 드는 노예근성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 자신들이 저지르는 행위로 인해서, 상대방이 처하게 된 처참한 상황과 죽음을 도외시한 채, 상상을 닫아버리는 범죄자의 일관된 단순무식함은, 이이히만에게 있어서는 공식적이고 상투적이며 진부한 관용어(공식언어Amtssprache)로만 표출된다.
즉, 아이히만이 온갖 상투어와 관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실제 '현실'과 차단된 벽을 만들고, '타인과의 공존 상황 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선량함'에 전혀 이끌리지 않고 악행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설명이었다. '아이히만의 사유'는 시종일관, 단순무식했고, 1차원적이며 피상적인 무배려(無配慮)였다. 타인의 현실적인 고통에 대한 인식무능력, 감정이입과 역지사지가 전혀 안 되는 공감 무능력,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에 대한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연민불감증! 이것은 사실상의 정서 질환이요, 인간 이하의 고질병인 셈이다! 합법적 폭력이라는 나치 명령체계 미명 아래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감성적인 표현무능력과 사고무능력(inability to think)은, 곧 역지사지의 무능력이라는 대학살 참상으로 직결된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법한 이런 뻔하디뻔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단순무식한 사악함은 곰팡이처럼 피어나 유대인 수용소 전역으로 번져갔다. 누군가가 합법적으로 가장된 악법 명령 체계하에, 상투어(Klischee)와 관용어(官用語:Redensart)라는 튼튼한 장벽 뒤에 숨어서, 고통받는 타인의 현존성(the presence of others)과 그들의 현실 상황 자체를 진지하게 배려하려 들지 않을 때, 그러한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와 어리석은 부주의함은, 장마철의 찌뿌둥한 습기처럼 진부하고도 단순한 (그러나 치명적인) 악의 곰팡이를 여지없이 피워낸다.  아이히만은 '악'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라서 대학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쓰는 평소의 부주의하고 상투적이고 관용어에만 안주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타인의 생명에 어떤 고통을 가하고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우스꽝스럽고도 한심한 상황 속에 안주했기 때문에 그는 범죄를 저질렀다. 인간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체계적인 논리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개념에만 만족하여 깊은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행동할 때,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어리석게도 악행을 이미 저질러 놓고 이데올로기를 탓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그러나 참고로 ’악은 상투적 피상성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진단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제국주의와 스탈린주의를 20세기 초반의 주요 전체주의 정치운동으로 묘사 및 분석)(1951)에서 ’악‘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진단한 것과 정반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법정에서조차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定言命令,Kategorischer Imperativ; categorical imperative; 斷言的인 無上의 명령)을 따르려고 항상 노력했다고 말한 아이히만은, 본질적으로 칸트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기 멋대로의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 아이히만은 정언명령에 내재한 "황금률"과 상호주의 원칙(principle of reciprocity)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그저 일반법을 준수하는 사람으로서의 합법적 행동 개념만 이해했을 뿐이다(외관상의 합법성). 칸트의 정언명령에서의 도덕률의 입법자는, 타인이 아닌, 도덕적 자아였지만, Eichmann의 윤리 관념 속의 입법자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타율적인 명령 수괴로서의 타자(他者)인 바로 히틀러였다.



우리도 오독하며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가장 깊이 있게 남는 정언명령을 되새기며 넘어가자!



너의 (개인적인)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수립[입법]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Act only according to that maxim whereby you can at the same time will that it should become a universal law.—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 사태의 내막을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유대인 학살에 일조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협력 혐의‘와 직면하게 된다. 아렌트의 또 다른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 당국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다. (비록 이 폭로로 인해 유태인실력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비난을 받게 되지만 그녀는 참으로 용감하고 솔직했다.) Arendt는 유럽의 유대인 조직과 지도층이 나치와 협력했으며 유대인 희생자 수가 그 규모에 도달한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 마을의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저런 이유로 나치에 협력했다. 만약 유대 민족이 조직화하지 않고 지도자가 없었다면, 총 희생자 수는 거의 400만에서 600만 명 사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지도자 회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판의 증인이었던 핀커스 프로이거(Pinchas Freudiger)에 따르면, 만약 유대인 지도부가 독일군에 수동적으로 항복하기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도망가라고 조언했었다면, 99%가 사망하지 않고 약 50%만이 체포되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 의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Freudiger 역시,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에 속했음에도, 경제적인 부유함과 나치 당국의 호의 덕분에, 그는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Arendt 2006, p. 125.]. 이처럼 역사에서 숨겨진 흑막과 밝혀진 사실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봉합된 프레임보다 훨씬 기막히고 비극적이다.
 

▲ 길고 험난한 인생길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신중한 사리분별력과 올곧은 방향감각을 잃게 될 때, '아차!' 하는 순간에, 누구나 수렁에 빠져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에 이르게 된다. 헌법과 법률과 양심을 망각한 채, 아무 주저 없이 직속상관의 명령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무조건 수용하려는 사람들도, 이미 선량한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한 자들이며, 그들은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지, 간악하고 기회주의적인 범죄자들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1980년 신군부와 그 부역자들의 만행을 상기해보라!)



 

이처럼 인간은 오욕칠정에 시달리는 생명체이다 보니, '견리사리(見利思利)'로 헛발을 디뎌 무너지는 사례는 너무나 흔하다. 그러나 비록 형극(荊棘)의 길일지언정 묵묵히 '견리사의(見利思義)'를 고수하며 인격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드물지만, 그들의 고매한 향기는 쉼 없이 흐르고 흘러서, 순국선열 안중근 열사의 단지(斷指)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낸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성과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을 만날 때마다, 착각과 후환을 없애고자 한다면,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악한 껍질을 벗겨내서 그 정체를 오롯이 밝혀내야 한다. 또한 인문학의 텍스트 속에서도 은닉되었거나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더욱더 깊고 세심하고 폭넓고 비판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예를 들어,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서양인들의’인간‘이라는 단어 속에는 ’유럽백인제일주의‘가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그것은 아테네 주변의 다른 모든 족속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 지속되었던 그들의 습관적인 위선과 불평등의 가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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