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연재_1. 인문과 환경의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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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03-05 조회수 8


1.인문과 환경의 함수관계




글: 강태원 회원(유튜브 크리에이터: 사색실천)



 

낡고 편협한 휴머니즘의 벽을 넘어, 지속적인 환경생태주의로 나아가자!



 

■ 제4차 산업혁명과 작금의 생태환경



2024년 2월 현재, 초연결성, 초지능성, 초융합성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 과학기술의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다. 이미 ‘새로운 인종’의 진화를 예견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이 등장했으며, 이진법의 디지털 세계는 아날로그적인 물리적 세계를 거의 남김없이 압도해버렸다. 그러나 그런 발전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한민국은 여전히 생명과 존엄성이 극도로 위협받는 생태환경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일본의 후쿠시마 핵폐수(nuclear wastewater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는 그러한 위협을 직접적이고도 극악하게 표출한 대표적 만행으로서, 한반도 연근해 해양 생태계와 주변 사회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명과 생태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는, 모든 실태를 치밀하게 규명하고 철저하게 반성해야만 한다. 언제 어디서라도 느닷없이 닥쳐올 듯한 새로운 유형의 전지구적인 팬데믹도, 오직 객관적이고 엄밀한 과학을 통해서만 그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었듯이, 21세기가 직면한 생태환경의 대난제들도, 기존의 인간 중심적인 인문학적 통찰만으로는 해결이 불가하며, 오로지 최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은 물론, 모든 학제 간의 융합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현대 문명에 다양하게 기여하고 있는 과학기술계가, 생명과 생태에 대한 장기적인 지속 방향을 통찰하지 않고, 무분별한 자본 설계와 영리 추구에만 몰두한다면, 지구 생물권의 조기 파국은 자명하다.



즉 개발과 돈벌이에만 눈먼 과학기술의 미봉책 탓에 조만간에 자연환경은 회복 불능 상태로 오염되고, 모든 생명은 변형-파괴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기술 지성은, 인문생태적 지성과 융합하여, 생명 윤리적인 통찰과 앞날에 대한 지혜를 모아, 지구 생명의 공존공영을 추구해야 한다.



 

■ 휴머니즘, 포스트-트랜스 휴머니즘을 넘어서, 생태주의로!



인간이성해방과 학예부흥적인 휴머니즘(인문주의,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이 오직 인간에게만 몰두하여, 사회변화에 따른 인간의 선도적 적응 능력과 자질을 원했을 뿐이라면, 지금의 제4차 산업 과학기술 혁명 시대의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사회-자연-생태에 대한, 전방위적이고도 융합적인 인식의 재확립을 요청한다. 지구 전체 생태계의 위기가 도래한 지금, 우리는 아직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편협한 망상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 없다. 왜냐면 문명 이기와 인간중심주의는 어리석게도 생태환경오염을 촉진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를 모두 함께 고려하고 배려하는 생태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어느덧 학계와 항간에는 ‘종’ 차별주의를 포기하고 모든 생명체의 공진화를 인정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최첨단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서 인간의 지적, 신체적, 심리적인 약점을 보완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인간 강화)도 나타났다. 이러한 인문적인 인식 태도의 변화를 참조하여, 우리는 생태주의 행진을 힘차게 이어가야 한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복잡다단한 생태환경 문제들은 더 이상 인간을 여유롭게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학제의 벽을 과감히 허물어서라도, 인간의 총체적 지식과 지혜와 열정을, 친환경 생명활동에 동원하여야만 한다. 철저하고 심도 있게 조사-연구-성찰-토론-합의하고,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 지구의 모든 생태환경에 관한, 총체적인 전 지구공학적 설계의 필요성



오늘날, 과학기술과 4차 산업혁명의 지배하에서 모든 것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논쟁적인 인문학자들보다도 오히려 과학자나 과학 관련 저술가들이 현대의 지식 논쟁을 더 많이 주도하고 있다. 심지어는 기존의 전인격 인문주의 교육이 실패로 여겨지면서,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인간강화유형’을 만들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도 안일하게 ‘문사철’에만 머무를 수 없다. 과거의 ‘문, 사, 철, 시, 서, 화’는 현대인문 교양학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이다. 왜냐면 현대적인 트랜스 인문 교양(líberal árts)은 자연과학, 응용과학, 생명과학 사회과학, 창작예술 등 전 분야를 망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생태 인문학과 환경 인문주의는, 동서양 고전과 경전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을 지양하고, 생명과 친환경에 필요한 인접 과학 영역을 적절하게 확장-섭렵하지 않을 수 없다.



주관의 인문학은 객관의 자연과학과 융합하여 생태 난제 해결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요컨대, 현재의 우리에겐, 지구의 모든 생태환경과 모든 생명체를 염두에 둔, 총체적인 지구공학적 설계가 필요하다. 오로지 그것만이 지속 가능한 자연환경의 활로이자, 생명체의 유일한 희망이다.



 

■ 생태와 무관했던 인문 관념의 변천 과정과 친환경적 트랜스 인문학!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인문학(Humanities)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재발굴된 라틴어 Humanitas(=로마시민의 교양 지식)에서 어원이 유래했다. 당시의 인문학은 서구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법·논리학·수사학·산수·기하학·음악·천문학의 실용적인 7과목으로 이뤄진 자유 학예이었지만, Humanities가 이론적 학문으로서의 '순수 인문학'의 입지를 굳힌 것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의 영향이었다.



이 현상은, 천동설을 폐기한 코페르니쿠스의 활동 및 중세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맞물린다. 교조적이고 편협한 신학적 세계관을 탈피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사유 주체로서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담론을 시작했다(Cogito Ergo Sum). 이렇게 데카르트 철학과 프랑스 계몽주의를 거친 인문학은, 전통적인 실과 중심에서, 문학, 사학, 고전학, 언어학, 철학 등의 이론적인 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부터 비과학적이라고 자주 멸시당하던 인문학은, 19세기 후반부터는, 주된 인문학적 정당성을, 개인의 자기성찰과 사회적 자아실현 장려라는 측면에서 찾았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학자들은, “서사적 상상력(narrative imagination: 이질적인 생활 경험과 타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 교감 능력)”을 내세우며, 인문학의 정당성 및 문화적 개방성과 포용력을 확립해왔다.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은,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효과적인 자아성찰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세계 시민적인 의무(기후문제, 생태환경, 인권 등)에 대한 공감과 연대와 이행을 촉진해왔다.(NGO 활동 등)



산업기술은 자연과학의 실천적 확장으로서 지구의 생태와 자연환경에 급격한 변화를 낳는다. 또한 정치기술은 사회과학의 유연한 확장으로서, 긍정적인 사회변혁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문화과학은, "문화학(culturonics)"의 실용적인 확장으로서 더 바람직한 문화의 변혁을 낳는다. 이 세 가지 확장을 조화롭게 합치면, 트랜스인문학이 되고, 거기에 생태환경주의를 접목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 목포 시민들이 지향하는 ‘친생태 친환경 인문학’으로 비견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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